2007년 12월 13일 목요일

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 : 로버트 게이츠 (3/4)

제 3 부 : 냉전의 최정점, 1983년
 

개혁의 시기에 병든 지도자…

  80년대 들어서 서방국가들의 경제 사정이 호전됐지만 소련의 경기 침체는 계속됐다. 그럼에도 군사력은 그대로 유지됐고 바로 이같은 구조적 모순점 때문에 점점 더 헤어날 수 없는 지경까지 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국가들은 의욕에 넘치는 새로운 지도자들을 내세웠지만 소련은 아직껏 병들어 죽어가는 지도자가 병상 통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개혁해야 할 시기에 병든 지도자는 치명적이었다.
 
  80년대 초반 소련 지도부의 교체로 CIA는 인적 정보망이 부족했다. 브레즈네프의 마지막 2년 동안 소련 집권층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 암투에 대해서도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다.
 
  우리는 브레즈네프의 지지 세력이 누군지는 알았으나 안드로포프의 세력이 어느 정도 강화됐는지는 좀처럼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안드로포프의 세력이 어느 정도 강화됐는지 좀처럼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안드로포프 KGB 의장의 지지 세력으로는 우스티노프 국방장관, 그로미코 외무장관, 고르바초프, 그리고리 로마노프, 그리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부패했던 레닌 그라드 공산당 서기장 등이 망라될 뿐이었다.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가 죽기 전에 이미 브레즈네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1982년 초 공산당 이론가이자 막후 협상가였던 미하일 수슬로프가 사망하자 KGB는 브레즈네프의 최측근과 가족들의 비리 혐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KGB는 브레즈네프의 딸 갈리나부터 조사했다. 갈리나는 당시 '집시 소년 보리스'라는 별명을 가졌던 모스크바 가수와 내연의 관계에 있었고 문제는 이 '집시 소년 보리스'가 '모스크바 서커스'를 끼고 대규모 다이아몬드 밀수를 해왔다는 점이었다.
 
  수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브레즈네프의 사위였던 KGB 제1부의장 세미온 즈비군 장군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소문에 의하면 그는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구속했던 '집시 소년 보리스' 역시 조사 첫날밤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질투심에 빠진 팔리나의 남편이 죽였든지 아니면 당국이 죽였든지 둘 중 하나였다.
 
  내무부 차관으로 갈리나의 남편이자 브레즈네프의 사위였던 유리 추르바노프 장군 역시 해고당했다. 브레즈네프의 측근들도 조사를 받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가 자살 했는지 (아니면 전혀 사실 무근일 수도 있지만) KGB는 서방 정보기관과 서방 기자들에게 이같은 소문을 고의적으로 흘렸다.


모스크바 한복판에 접근

  브레즈네프는 사망 직전 콘스탄틴 체르넨코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실패했다. 반면 안드로포프는 1982년 우스티노프 국방장관과 군부 및 KGB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조직적 후원이 없었던 체르넨코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1982년 봄 이미 후계자는 결정된 상태였고 체르넨코 자신이 안드로포프를 추천했다는 정보가 입수됐었다.
 
  1982년 8월 3일 빌 케이시 부장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브레즈네프의 장기 집권에 따른 후유증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부터 나온 정보에 따르면 당시 소련 사회는 만연된 부패와 경제 침체, 강력 범죄 등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는 것이다.
 
  어떤 정보 보고에 따르면 경찰국가였던 소련에서조차 도둑이 극성을 부린다고 했다. 고관대작이 참석한 한 연회장에서 밍크 코트 여섯벌이 없어지는 촌극도 빚어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또 고르키와 토글리아티 등에서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지만 당국은 팔짱만 끼고 있었다. 포섭된 KGB 요원에 따르면, 당시 KGB 지도부 사이에서는 국가 기강을 바로 세워야한다는 생각이 팽배했다고 전했다.
 
  1982년 11월 10일 브레즈네프는 사망했고 안드로포프가 후계자로 지명됐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슐츠 국무장관은 안드로포프를 매우 교활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말을 바꾼다는 것이었다. 부시 부통령과 만날 때는 부드럽던 사람이 독일 대표단에게는 협박조로 나왔다고 한다. 브레즈네프의 장례식 덕분에 ClA는 모스크바 한복판에 접근할 수 있었다.
 
  15년 동안 KGB 의장을 지낸 안드로포프는 개혁을 원했지만 민주투사는 아니었다. 그의 개혁은 전체주의 국가의 통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있었다.
 
  당시 대통령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나는 '안드로포프는 국가 기강확립과 국내 부패 척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며 폴란드에서 처럼 결코 노동조합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때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은 안드로포프가 죽어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집권 15개월 동안, 특히 병상에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소련과 교황청의 비밀접촉

  메흐메트 알리 아그카라는 인물이 1981년 5월 13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암살을 시도했다. 아그카의 배후에 소련이 있었는지, 불가리아 정부가 개입했는지, 또는 터키 극우주의자들이 자행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에 싸여있다. 하지만 소련이 개입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황이 동구 유럽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는 소련의 정책과 정면으 로 충돌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특히 1978년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요한 바오로 2세가 고국인 폴란드로 금의환향, 폴란드 민족감정을 부추기고 자유노조를 지원했다는 게 소련의 시각이라는 것이다. 소련은 또 교황이 폴란드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및 동구 유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 지적이다. 이로 인해 동구 유럽의 몰락에 그치지 않고 소련 제국의 파멸로까지 이어질 지 모른다는 우려가 소련집권층에서 팽배했고 결과적으로 교황 암살을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다.
 
  CIA 내부에서는 반대로 생각했다. 소련은 교황을 통해 동구권에서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다고 보고 1980년 가을부터 교황청과 비밀 대화 창구를 마련했다 . 이때는 폴란드 그다니스크에서 자유노조 문제가 폭발 일보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었다.
 
  카사롤리 추기경이 연락관 역할을 했고 소련과의 비밀 대화는 교황이 직접 챙겼다. 여러 차례 비밀 대화를 통해 소련은 폴란드 자유노조가 자제하여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교황에게 요청했다.
 
  소련은 교황에게 만약 상황이 악화되면 군사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전달했다. 바티칸이 대화에 참여한 이유는 소련의 군사개입을 막아보자는 데 있었다. 교황은 소련의 군사개입이야말로 엄청난 사상자를 몰고 올 것이라고 믿었다. 교황은 당연히 자유노조 편이었지만 소련을 자극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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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0월 러시아 방문, 장래 KGB를 책임지는 프리마코프 만남

  1980년 11월 중순 교황과 카사롤리 추기경은 소련과의 대화가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적어도 소련의 군사개입을 막을 수 있었다고 보았다. 소련 역시 이탈리아 공산당과의 대화에서 폴란드 상황을 진전시키는 데 교회의 역할이 컸다고 말한 바 있다.
 
  소련 지도부는 1980년 12월 초 폴란드에 대한 군사개입 원칙을 결정놓고도 망설이고 있을 때 바딤 자글라딘을 바티칸에 보내 "결코 군사개입을 원하지 않는다"고 교황에게 다시 한번 다짐했다. 교황도 이때부터 폴란드 최대의 적은 소련의 군사개입이 아니라 소련의 압력을 받고 내부 탄압에 나서는 폴란드 軍이었다는 판단을 내렸다.
 
  암살 기도 수주 전 소련과 바티칸의 접촉 빈도는 눈에 띄게 잦아졌다. 바르샤바 조약군은 때마침 '소유즈 훈련' 중이었다. 교황은 1981년 3월 28일 두 시간 동안 바티칸 주재 소련 대사를 단독 접견했다. 이후 교황은 측근에게 폴란드에 대해 소련과 합의했다면서 폴란드 정부 고위 관계자가 4월 바티칸을 방문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련은 향후 6개월 동안 폴란드 침공을 연기하겠다고 교황에게 약속했다.
 
  4월 19일부터 25일 사이 소련대사는 교황과 카사롤리 추기경과 세 차례 만나 폴란드 사태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고 있으니 교회가 지속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카사롤리 추기경은 교황 역시 회동 결과에 대해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폴란드 자유노조, 정부, 군의 현대화를 촉구했다고 밝혔다.
 

교황 암살 기도 사건의 배후

  아그카의 암살 기도 이후에도 소련과 바티칸의 대화는 유지됐다. 카사롤리 추기경은 그 해 6월 폴란드 사태 진전을 위한 바티칸의 노력이 교황의 느린 회복으로 더뎌졌다고 밝혔다. 이는 교황만이 폴란드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소련은 오로지 교황하고만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양측간 대화는 폴란드군이 계엄을 선포한 1981년 12월까지 계속됐다.
 
  암살 기도 사건에 대한 이탈리아 기관의 수사가 진행될 때 CIA는 정책 입안자들로부터 배후세력이 누구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그러나 배후세력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했고 이탈리아 수사기관으로 부터 넘겨받은 수사 자료는 허점 투성이였다.
 
  나는 당시 케이시 부장에게 만약 소련이 교황 암살의 배후였다면 아그카는 완벽한 암살범이 아니었다고 보고했다. 케이시는 1982년 12월 20일 ClA 내부의 입장을 모아 슐츠, 와인버거, 클라크 에게 보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교황 암살 기도 사건은 한동안 CIA를 괴롭혔다. 왜 소련이 배후인데 입증을 못하느냐는 비난에서부터 일부에서는 CIA가 배후 아니냐는 모함까지 했다. 상원 청문회에서도 증언했지만 1985년까지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동서 유럽을 아무리 뒤져도 교황 암살의배후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케이시 부장은 속으로 소련이 배후였다고 이미 단정해놓은 상태였고 CIA가 입중을 못한다고 들들 볶았다. 1984년 겨을 불가리아와 소련이 개입했을지 모른다는 정보가 입수됐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소련이 붕괴됐지만 냉전시대 사건 중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유일한 케이스가 바로 교황 암살 미수 사건이다.


브레즈네프의 실수

  1983년이야말로 美蘇 양국간에 오해와 불신으로 점철된 한 해였고 그로 인해 긴장감이 최고 조에 달했던 때였다. 美蘇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으나 소련 지도부가 미국의 정책에 위협을 느끼고있다는 점은 간파하지 못했다. 왜 간파하지 못했을까. 우리는 소련 지도부의 폐쇄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1983년 초부터 서방국가들은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고 눈부신 기술발전이 군사력에 쓰이기 시작하면서 소련 지도층의 불안은 가증됐다. 더군다나 소련은 미국이 경제적 부담도 없이 국방 예산을 급격히 늘렸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핵 선제 공격력을 강화시켜 주었다고 븐 것이다. 특히 서방 세계가 對공산권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과거와는 달리 군사력을 앞세우려 한다는 점이 크레믈린을 내내 괴롭혔다.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에 취임한 지 두 달 만에 병원에 입원했고 죽을 때까지 심각한 투병 생활을 해야 했다. 그의 와병은 소련의 개혁 시기를 늦췄고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한 것이었다. 소련 지도층은 혈기왕성한 서방국가 지도자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소련 망명자들은 우리들에게 소련 집권층이 서방 세계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얼마나 두려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소련 지도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열등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브레즈네프가 70년대 저지른 중대 실수중 하나는 1977년 핵탄두 세 개짜리 SS-20 미사일을 유럽 전장(戰場)에 전진 배치한 것이었다.
 
  나토는 1979년 소련과 핵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키로 결정했다. 나토는 소련이 SS-20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는 한 1983년 11월까지 퍼싱-II 미사일을 배치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폴란드에 계엄이 선포되고 미소간 긴장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1982년 중거리 미사일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슐츠 국무장관은 퍼싱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위해 유럽 각국으로부터 지지를 얻어내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을였다. 소련은 당연히 퍼싱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저지하기 위해 비밀 공작에 돌입했고 CIA는 소련의 비밀 공작을 막는데 주력했다.
 
  소련은 특히 80년대 초 유럽에 불어닥친 평화 운동에 침투해 퍼싱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저지하고 소련의 의지대로 끌어가려고 했다. 소련은 핵 배치를 반대하는 단체들에게 자금 지원에서부터 조직 운영 능력, 전략 전술, 심리전 등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소련은 또 유럽 공산당을 동원, 지역 평화 운동 단체에 침투시키고 미군 문서와 정책 문서를 위조해 뿌리고 다녔다.
 
  유럽 공산당은 제3당을 통해 독일, 네덜란드, 영국, 벨기에 등에서 퍼싱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반대하는 공작을 벌였다. 동독 공산당은 독일 평화 운동 단체에 매달 2백만 달러씩 지원했다.
 
  덴마크 정부는 1982년 3월 소련이 덴마크 공산당 총재와 덴마크-소련 친선단체를 통해 매년 10만 달러씩 덴마크 평화단체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적발해냈다. 이런 일은 즐비했다. 소련은 심지어 각 지역별 평화단체를 조종, 反美 및 反나토 분위기 조성을 꾀했다.


유럽평화 단체들의 자각

  소련은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면서도 방어에 신경 썼다. 소련 정부는 1982년 가을 유럽 각 대사관에 소련의 미사일 배치와 관련해 反蘇 감정을 파악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소련은 1982년 5월 편지까지 위조할 정도였다. 소련은 헤이그 국무장관이 핵배치와 관련, 룬스 나토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위조해 벨기에와 네덜란드에 뿌렸다. 문제의 편지는 나토의 정책을 왜곡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서독 공산당은 정부가 수도 본에서 핵무기 이동과 관련, 본 시민들에게 경고한다는 내용을 담은 서류를 위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유럽 평화 단체들은 소련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고 이는 소련의 공작을 훨씬 어렵게 만들었다. 이들 평화 단체들은 反美 시위뿐만 아니라 反蘇 시위까지도 함께 벌이기 시작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CIA가 유럽의 평화단체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던 레이건 행정부의 보수파 인사들을 설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보수파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反美 시위는 소련의 조종으로 일어났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자생적으로 생겨난 단체이며 유럽 사람돌의 정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소련의 온갖 방해에도 볼구하고 퍼싱-II 미사일은 1983년 11월 14일 영국에 배치됐고 곧이어 서독에도 퍼싱 미사일이 들어갔다. 소련은 SS-20 미사일을 전진 배치했다가 되레 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슈미트에 의해 시작돼 카터가 추진했고 레이건이 끝낸 중거리 미사일 배치는 美蘇간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기에 이르렀다.
 
  중거리 미사일 배치가 속속 진행되던 1983년 봄 레이건 대통령은 전국 목회자 협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소련을 '악마의 제국'으로 묘사해버렸다. 소련은 그동안 줄곧 동반자적 관계를 원했지만 카터가 인권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소련 집권층에 대한 정통성에 흠집이 갔고 레이건조차 '악마의 제국'으로 폄하해버리자 극도로 분노했다.
 
  레이건은 2주 후 더 강한 '펀치'를 날렸다. 레이건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소련이 핵공격을 할 경우 발사와 동시에 적 미사일을 요격하는 전략방어안(SDI)을 발표해버렸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데도 레이건 추종 세력과 소련 지도부는 그같은 무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SDI는 소련의 악몽이었다. 미국의 기술과 자본, 운용 능력 등으로 SDI가 구축된다면 소련이 지난 25년동안 쌓아온 무기체계는 하루 아침에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었다. 소련이 미국에 대적하기 위해 신무기를 개발한다면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될 것이고 소련으로서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CIA는 레이건이 SDl를 발표하기 1년 전부터 타당성 조사를 벌였다. 소련은 이미 우주 프로그램을 통해 공격 미사일을 요격하는 무기 체계 개발을 연구하고 있었다. 소련은 또 유일하게 모스크바 주변에 미사일 요격 시스팀(ABM)을 갖추고 있는 나라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련은 전국에 광범위한 레이더 기지를 만들어 조기 경보망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물론 군축협상에 위배되는 사항이었다.
 
  CIA는 이밖에도 소련이 레이저, 열 공학, 입자 빔, 전자파 등 첨단 기술을 군사 목적에 접목시키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히 레이저 빔을 연구하기 위해 10여개의 연구소를 차려놓고 시험 사격장까지 마련해놓은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 같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발목을 잡는 것은 원격 조종장치 기술과 컴퓨터 기술의 낙후라는 사실도 첨부했다.


KAL기 격추, 냉전 막바지의 비극

  SDI에 찬성했던 사람들은 SDI가 소련의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고 이 때문에 소련이 붕괴했다고 주장한다. 몰론 SDI가 소련 지도부를 괴롭힌 것은 사실이다. 미국이 처음으로 실현 가능한 군사 전략적 무기체계 개발에 나섰고 소련이 아무리 발버등쳐도 당시 경제상황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점을 소련 집권층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개발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내 생각에는 소련 집권층이 SDI 자체를 무서워한 게 아니라 SDI라는 아이디어에 위협을 느꼈다고 본다. 즉 도저히 미국과 경쟁이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소련 지도부는 내부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느꼈고 한번 시작된 개혁온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진행됐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레이건의 '악마의 제국' 연설로 미국이 소련에 대한 핵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안드로포프는 결론지었고 양측간 긴장감은 더욱 더 고조됐다.
 
  냉전 막바지에 일어난 최악의 비극은 1983년 9월 1일 소련 공군의 대한항공 격추 사건이었다. 소련 공군은 노선을 이탈해 소련 영공으로 들어온 비행기를 추적하다 SU-115기를 띄워 요격해버렸다. 소련 공군기의 민간 비행기 요격사건은 소련 정권의 무자비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美 정보기관들은 소련의 잔학성을 고발하는 증거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ClA는 공격하는 조종사와 지상 레이더 기지간의 대화 내용을 입수했다. 입수된 내용에는 비행물체에 대해 공격하라는 소련 공군의 명령, 명령을 접수했다는 조종사의 말과 목표물을 명중시켰다는 대화 내용 등을 수록하고 있었다.
 
  슐츠 장관은 이같은 내용을 10시 45분 기자회견장에서 공개했다. 슐츠는 시간대별 대화기록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지만 분노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미국민이 느끼던 분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소련때문에 수백명의 죄없는 생명이 순식간에 바다 속으로 추락했고 미국민들은 그저 반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련 공군 조종사는 결과적으로 민간 비행기임을 알면서도 잔학하게 요격해버린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정보 기관들은 사건 일지를 재정리하면서 생각보다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ClA는 9월 2일 대통령 일일 보고서에서 '소련공군은 줄곧 美 RC-135 정찰기를 요격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실제 美 RC-135 정찰기가 소련의 미사일 시험을 정찰하기 위해 부근 지역에서 정찰 비행을 했다'고 밝혔다.
 
  우리는 소련 공군이 적어도 한 시간동안 美 RC-135 정찰기를 추적하다 대한항공 비행기를 찾아냈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련 공군 조종사는 한 시간 뒤쯤 "눈으로 직접 목표 물체를 발견했다"고 보고했고 공격하기까지 14분 동안 비행물체 주변을 맴돌면서 "한때는 2Km까지 근접했다"고 추가 보고했다. 그는 이같은 대화 중에도 비행물체가 여객기라는 사실을 밝힌적은 없었다.


정보보고와 행정부 발표 간의 차이

  같은 날 오후 대통령이 참석한 국가 안보회의에서 케이시 부장은 "요격지점에 정찰기가 없었으나 대한항공이 캄차카 반도 북동쪽으로 진입하면서 美정찰기와 대한항공을 혼동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밝혔다. 사실 ClA와 DIA는 소련 지상 레이더 기지가 오판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행정부의 구호는 알려진 진실과 상관없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9월 5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對국민 담화문에서 "조종사가 민간 여객기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고 단언했다. 이틀 후 진 커크 패트릭 유엔대사는 "소련이 애초부터 민간 여객기를 격추하려고 마음먹었고 또 요격해 무고한 269명을 살해한데다 거짓말까지 일삼고 있다"고 비난했다.
 
  격추와 관련된 진실이 조금씩 언론에 새나오면서 정보기관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비난이 정책 입안자들로부터 쏟아져 들어왔다. 1983년 10월 7일字 뉴욕타임스는 대통령과 슐츠가 정확한 정보보고 를 받지 못했다고 썼다. 즉 소련 조종사가 민간 여객기인 줄 모르고 요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CIA가 대통령과 슐츠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케이시 부장은 뉴욕타임스의 기사에 대해 심기가 불편했다. 고위직에 있는 동료들이 그 기사를 믿을 지 모른다는 점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10월 13일 슐츠와 와인버거, 클라크에게 '실제 정보 보고한 내용과 행정부가 발표한 내용 가운데 차이가 있을 지 모른다는 기사 내용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메모를 보냈다.
 
  케이시는 메모에서 뉴욕타임스 기사 가운데 일부는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뉴욕타임스 기사에는 소련 조종사가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비행물체를 요격했다는 점과, 조종사가 민간 여객기인 줄 모르고 미사일을 발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그리고 소련 조종사가 姜 RC-135를 격추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면서 케이시는 뉴욕타임스 기사 내용이 나중에 밝혀진 게 아니라 사건 발생 직후 CIA 정보보고에 이미 포함됐었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케이시는 또 9월 2일 대통령 일일 보고서에서 소련 조종사가 민간 여객기인줄 모르고 요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했고 이같은 사실은 레이건 행정부에 24시간 이내에 이미 전달됐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일부 관계자들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로 사실대로 발표하지 않았고 일부는 우리를 믿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이같은 내용은 슐츠의 회고록에도 나와 있다. 슐츠는 소련 공군측의 실수였을지 모른다는 의견이 제시되자 자기 참모들에게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ClA가 그같은 해괴한 논리를 펴는데 대해 CIA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ClA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참모들에게 "CIA가 거짓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고 말했다.

 

美蘇 무력충돌 우려 팽배

  왜 ClA가 소련을 감싸고 돈다고 생각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케이시는 더군다나 초강경파였다. 그런 초강경파가 무엇 때문에 궁지에 몰린 소련을 도와주기 위해 소련 공군의 실수였을지 모른다는 발언을 했겠는가. 한 마디로 슐츠의 과민반응이 었다. CIA는 단순히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했을 뿐이지 다른 의도는 없었다. 다만 우리가 보고한 진실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했다는 점은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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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1월 고르바초프와 정상회담을 앞두고, 레이건 대통령에게 브리핑

  1992년 러시아 정부는 83년 격추사건 당시 공산당 간부회의 대화기록을 공개했다. 여기서 우리는 우스티노프 국방장관 등이 모든 요격 절차가 적법했다고 주장한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이 소련을 야만국가로 몰아붙이자 이들 공산당 간부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면서 자위했다.
 
  사건 발생 10년 뒤 유엔은 93년 6월 15일 소련 공군 조종사가 대한항공 여객기를 美 RC-135 정찰기로 오인, 요격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엔 조사보고서는 또 적어도 극동방어사령부의 고위 지휘관 2명이 요격 10분 전쯤에 비행물체가 여객기일지도 모른다고 문제 제기했다는 점도 포함했다.
 
  사건 발생 후 행정부는 어떻게 사태를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슐츠는 마드리드에서 그로미코와 회담을 갖는 게 좋다고 주장했고 와인버거는 반대했다. 슐츠가 그로미코와의 회담에서 대한항공 사건과 인권문제만 회의 의제로 올리겠다고 하자 레이건은 슐츠의 손을 들어줬다.
 
  슐츠와 그로미코 간 대화는 매우 날카롭게 진행됐다. 그로미코 는 회고록에서 '14명의 국무장관과 대화를 나눠 보았지만 가장 신경이 날카롭게 대립했던 때가 슐츠와의 회담이었다'고 술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간 비밀 접촉이 시도됐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SDI, 대한항공 격추 사건, 퍼싱-II 미사일 유럽 배치, 소련의 군축협상 거부 등 일련의 사태로 양국간 긴장은 전후 최고조에 달했고 두 나라 간에 무력 충돌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실제 팽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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