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13일 목요일

우리는 소련을 이렇게 붕괴시켰다 : 로버트 게이츠 (2/4)

제 2 부 : 인권정책으로 촉발된 소련의 몰락
 

소련 멸망은 헬싱키서 시작

  소련은 유럽국가들로부터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 소련이 참여할 수 있도록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베를린 사태를 진전시킬 뿐만 아니라 인권문제가 담긴 헬싱키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선언문 3장에는 사람과 사고(思考)의 '자유통행'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는 순전히 유럽 국가들이 집어넣은 문구였다. CSCE 회의는 전후 미국과 소련이 유럽을 양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1975년 포드 대통령은 헬싱키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헨리 잭슨 상원의원 등 보수파 인사들은 한결같이포드 대통령에게 불참할 것을 종용했다. 뉴욕 타임스 등 유수언론들도 사설을 통해 헬싱키 방문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포드의 측근들은 키신저가 대통령을 잘못 보좌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소련 제국의 쇠락은 바로 이 헬싱키 협약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빌 하이랜드 역시 "소련의 멸망은 헬싱키에서 시작됐다"고 단언했다.
 
  바로 CSCE 회원국들이 소련 공산통치에 저항하는 불씨를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동구권 및 소련 내에서도 개혁을 표방하는 비정부 단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저항의 불씨는 몇개월 후 폴란드에서 폭발했고 결국 소련의 몰락을 가져왔다.
 
  CSCE의 인권문제로 제일 먼저 영향을 받은 나라는 폴란드였다. 레흐 바웬사는 1976년은 개혁에 불을 당긴 해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헬싱키 협약에 따라 '인권보호운동' 같은 단체들이 폴란드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 노동단체들도 영향을 받았다.
 
  동독에서도 헬싱키 협약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CIA보고에 따르면 동독의 호네커 서기장이 국내 안정을 위해 보다 더 강력한 탄압정책을 펴야 한다고 소련에 밝혔다는 것이다. 특히 동독 반정부 인사들의 메시지가 서방언론에 집중 보도되고 있고 발언 내용이 동독 내로 파고 들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호네커는 또 헬싱키 협약에 자극받은 동독인들의 서독 이민 신청이 급증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포드의 헬싱키 방문

  소련이 헬싱키 협약에서 인권보호를 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선 것은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적으로 크나큰 실수였다. 헬싱키 협약은 동구 유럽뿐만 아니라 소련 국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유태인과 지식인에서부터 소수민족과 기독교도 등까지도 들고 일어났다. 소련은 헬싱키 협약에 동의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이 자유를 누리도록 정당성을 부여하고 만 것이었다.
 
  CIA는 1977년 2월 18일 카터 신임 행정부측에 왜 소련이 인권 문제에 대해 민감한가에 대해 브리핑했다. 이 보고서에서 '소련은 서방국가들이 소련 등 동구 공산국가들의 인권문제를 부추겨 질서파괴를 꾀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쓰여져 있다.
 
  포드의 헬싱키 방문은 협약에 도장을 찍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실수나 우연이 아니라 포드의 치밀한 계산에 따라 헬싱키 방문은 이루어졌다. 당시 포드의 헬싱키 방문을 비난했던 측근 인사, 언론인, 동구 유럽국의 후손들은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은 CSCE 참여를 간절히 바랐고 또 얻어냈다. 그러나 멸망의 덫에 스스로 빠진 것이었다. 포드는 정치적으로 큰 대가를 치르면서도 헬싱키에 참석했다. 낙선의 한 요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훗날 CSCE가 엄청난 국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카터는 대통령 유세 때부터 닉슨-포드-키신저의 현실주의 국제정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들의 현실주의 정치는 중요한 원칙을 어겼다고 보았다. 카터는 인권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군축협상을 이끌어낼 것으로 믿었다.
 
  1977년 2월 1일 카터가 도브리닌 소련 대사를 만났을 때도 "소련의 국내문제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대신 헬싱키 협약 등 지금까지 맺은 협약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소련이 헬싱키 협약에 서명한 것은 두 나라간에 인권문제를 의제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2월 중순 안드러이 사하로프 박사가 카터에게 자신의 역경을 기술한 편지를 띄웠다. 밴스, 브레진스키와 의논한 카터는 사하로 프에게 답장을 보냈다. 소련에서의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하로프의 노고에 깊온 사의를 표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련은 2월 말 카터가 사하로프에게 편지를 보낸 데 대해 불쾌한 감정을 나타냈다. 헬싱키 협약의 영향을 간파한 소련은 이 무렵 국내 반체제 인사에 대한 검거에 나섰다. 헬싱키 위치 그룹의 창립자인 유리 오르로프, 알렉산더 긴즈버그, 아나톨리 사란스키 등이 구속됐다.
 
  ClA는 헝가리 지도부로부터 소련 지도충이 반체제 인사들을 몹시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헝가리측에 따르면 소련 정권의 전복을 위해 미국이 의도적으로 인권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소련 지도층은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권정책, 소련 정권에 흠집 내

  인권 신장 정책 및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원조, 그리고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정책은 소련 정권의 정통성에 큰 흠집을 냈다. 특히 취임 직후 브레진스키는 카터의 동의 아래 소련 정권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대대적인 정책을 수립했다. 카터는 소련 내에서 선전활동을 강화시키자는 브레진스 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ClA 및 행정부의 반대와 오랜 관료주의로 인해 정책이 실행에 옮겨지는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지금까지 동서 대결의 장이 동구유럽이나 소련 국내였던 적은 단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이념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정책이 마련됐다.
 
  첫째, 반체재 인사들의 글이 널리 배포되도록 비밀 조직을 활성화시키자는 것. 둘째, 동구 유럽국 반체제 인사들이 책을 출판할 수 있도록 자금올 지원하자는 것. 셋째, 우크라이나에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책자들을 반입하고, 넷째, 서구 유럽에서 소련의 인권문제를 감시하는 단체에 대해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국무부와 국방부는 마지막 두 가지 방법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서구유럽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다 적발되면 곤란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이같은 정책은 그해 10월이 지나서도 서류로만 맴돌았다. 국무부와 ClA는 내부적으로 소련 국내에서의 비밀 활동에 대해 말이 많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ClA는 소련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이나 접촉은 유지하지 않고 있었다. 서방에서 출판된 반체제인사들의 글을 다시 소련으로 반입하는 작업은 계속했지만 소련 KGB가 반체제 인사들을 엄중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험 부담은 매우 컸다.
 
  민족주의 문제를 부추기자는 제안에 대해 국무부는 비관적이었다. 예를 들어 중앙 아시아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레진스키는 민족문제를 부추기는 데 매우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국무부로 하여금 소련 내의 소수민족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한다을 대안을 제시했다. 1978년 6월 20일이었다.
 
  국무부는 보고서를 통해 미국은 소련 소수민족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소련 소수 민족에 대한 정보 수집을 확대시키자고 역으로 제안했다. 특히 문제의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거슬러 을라가야 한다고 밝혔다. 전형적인 국무부의 물귀신 작전이었다.
 
  국무부는 소련의 민족문제에 대해 내부적으로 두가지 이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고 밝혔다. 우선 민족주의 문제는 소련의 국가 경제를 좀먹고 군사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의 분할을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는 국가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같은 현상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권장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또다른 견해는 소련 정권이 내부적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며 이릴 경우 외부에서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브레진스키. 민족문제 정책화

  국무부는 이밖에도 몇가지 문제를 추가로 제기했다. 민족문제는 소련뿐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일부 동구 유럽 국가에서도 큰 골칫거리라는 것이다. 민족문제는 늘 폭력이 뒤따른다는 점을 국무부는 지적했다. 국무부는 또 해외에서의 민족문제가 미국 국내에 끼치는 영향에도 신경을 썼다.
 
  이같은 국무부의 입장이 CIA 내부에서도 꽤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소련 내 민족문제를 부추기자는 비밀 공작은 카터 행정부 내내 탁상공론에 머물렀다. 결과론적으로는 소련 내 소수민족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그같은 비밀 공작은 필요없었던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브레진스키는 카터의 신임 아래 소련 내에서 민족문제를 부추겨 소련을 궁지에 몰아넣는 정책을 입안했다. 국무부와 CIA가 의도적으로 브레진스키의 발목을 잡았지만 동구 유럽 및 소련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유입되는 반체제 서적들의 양은 늘어만 갔다.
 
  브레진스키는 또 '미국의 소리' 라디오 방송을 통해 보다 광범위하게 소련 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소식이 전달되도록 했다. 카터 대통령은 1977년 3월 22일 의회를 설득, 라디오 송신 장비 예산을 받아냈다. 브레진스키는 소련의 전파 방해를 극복할 수 있는 250Kw짜리 송신기 16개를 받아냈다.
 
  라디오는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망명 소련 반체제 인사였던 아드레이 아말리크는 1977년 "수백만 소련 시민들에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라디오가 유일한 정보였다"면서 "반체제 인사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고 밝힌적이 있었다" 브레진스키는 훗날 회고록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것은 정치적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헬싱키 협약 이후 인권 감시기구의 등장과 소련 반체제 인사들의 활성화로 인해 서방 언론은 이들 반체제 인사들의 글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면 미국 라디오 방송은 보도 내용을 다시 소련 내부로 방송했고 CIA는 대서특필된 글을 소련 내부로 비밀리에 반입, 반체제 인사들에게 배포했다.
 
  서방국가로부터 반입되는 정보는 소련 국내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카터의 선전선동 정책과 비밀 공작은 소련 제국의 멸망을 촉진시켰다. 카터의 이념 전쟁은 후임자들에 의해 지속됐다.
 
  카터는 사실 냉전의 기본 법칙을 바꾸어 놓았다. 카터는 트루먼 대통령 이후 처음으로 인권문제를 통해 소련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 시비를 걸었던 대통령이다. 소련이 가장 싫어했던 대통령이 카터가 아니었던가 싶다.

 
카터는 소련이 가장 싫어한 美대통령

  카터의 인권정책이 미국내에서는 나약한 것으로 비쳤다. 그러나 훗날 소련 반체제 인사들은 한결같이 카터의 인권정책을 높이 평가했으며 바로 그 같은 인권정책으로 민주투사들이 힘을 얻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카터의 정책은 동구유럽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인권 감시 기구들에게도 한가닥 희망이었다. 카터의 업적은 반체제 인사들이 서방국가로 탈출하면서 새삼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그 당시에는 재선 실패와 함께 묻혀지고 말았다.
 
  헬싱키 협약과 카터의 인권정책, 그리고 카롤 보이틸라 추기경의 교황선출이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처음 두 가지는 보수파들 때문에 인정받지 못했다. 폴란드인이 교황에 선출된 게 폴란드와 소련을 바꾸어 놓으리라고 생각한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월터 리프먼은 "자기가 심은 나무의 그늘에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말했다. 포드와 카터는 인권문제를 통해 거대한 감옥이었던 소련을 무너뜨렸다. 1975년과 1978년 사이 이들은 소련을 파멸시키는 독버섯을 심어놓았던 것이다.
 
  1975년부터 1978년사이 크레믈린은 아나톨리 사란스키를 CIA 첩자라며 구속하는 등 반체제 인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크레믈린은 또 반체제 인사들의 글을 받아 서방 언론에 대서특필하는 미국 기자를 표적으로 삼았다. 1978년 6월 13일 KGB는 데이비 쉽플러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지국장에게 미끼를 던졌다.
 
  소련 당국은 쉽플러에게 분실된 우편배달물이 있으니 인근 군부대에서 찾아가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낌새가 수상하다고 여긴 쉽플러는 군부대에 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KGB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27일 소련 당국은 볼티모어 선紙의 해롤드 파이퍼 기자와 뉴욕타임스 의 크랙 휘트니 기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다.
 
  KGB가 반체제 인사들을 구속하기 시작한 5월 17일 브레진스키는 스탠스필드 터너 CIA 부장을 통해 美 연방수사국(FBI)이 KGB 간부 요원 세 명을 구속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FBI는 이들 3명중 한 명에게만 외교면책권을 부여해 추방하고 나머지 두 명은 구속할 방침이었다.
 
  5월20일 FBI는 발딕 엥게르와 루돌프 체르나예프를 간첩혐의로 체포했다. 이들은 FBI의 함정수사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FBI의 통제를 받고 있던 美 해군 장교가 군사기밀을 팔겠다고 접근하자 선뜻 받아들였다. 연방법원은 이들에게 각각 2백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걸었다. 지금까지 소련 간첩에게 내려진 최고 보석금은 1963년 50만 달러였으나 이마저 나중에는 10만 달러로 낮아졌었다.
 
  5일 후 美 전문가들은 모스크바 주재 美대사관에 최첨단 도청장치가 설치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같은 날 소련 당국은 워싱턴 대사관을 통해 엥게르와 체르나예프의 구속에 대한 두 번째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화가 난 KG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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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백악관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났다. 가운데는 부시 대통령.

  한편 소련 당국의 뻔뻔스러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 대사관측은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대사관 이웃집에 무단 침입했다면서 항의서한올 들이댔다. 美 통신 전문가들은 도청장치를 따라가다 이웃집에서 도청시스팀을 발견했던 것인데 소련은 오히려 적반하장이었다.
 
  그러면서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미국측 도청장치가 발견됐어도 언론에 흘리지 않았으니 비숫한 조치를 취해주기 바란다는 요지를 덧붙였다. 그러나 1주일 뒤 소련의 美대사관 도청 사실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KGB는 5월 말 모든 요원들에게 미국에 의한 KGB 간부 요원 3명의 구속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KGB의 지령은 모스크바 지국에도 떨어졌다. 협박과 명예 훼손을 통해 미국 시민을 괴롭히라는 것이었다. KGB가 단단히 화가 났던 것만은 틀림없었다.
 
  6월 9일 도브리닌 대사는 밴스와 회동해 보석금을 내리지 않으면 대대적인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이 법칙을 어겼다면서 만약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맛을 보여주겠다고 공언했다. 3일 후 KGB는 약속대로 했다. 제이 크로포드라는 미국 사업가를 불법 환전한 혐의로 전격 구속해버렸다.
 
  다음날 美 대사관은 이즈베스티야紙가 모스크바에서 미국의 스파이 활동을 보도한 데 대해 항의했다. 6월17일 도브리닌은 두 나라간에 찬바람이 불자 소환당했다.
 
  소련은 7월 7일카터 대통령이 해군사관학교에서 한 연설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는 소련측에 "헙력 아니면 싸움을 택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소련은 카터 대통령이 브레진스키의 배후에서 反소련 무드를 조성한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특히 브레진스키가 중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터의 발언이 튀어나왔기 때문에 소련은 미국이 중국과 손잡고 소련을 따돌리려고 한다는 의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냉랭한 여름이 계속됐다.


스파이와 반체제 인사를 교환

  6월 22일과 26일 사이에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이 벌어졌다. 밴스는 도브리닌을 만나 두 간첩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샤란스키 등 소련 반체제 인사들과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물론 소련 간첩을 소련 반체제 인사들과 교환하기는 처음이었다.
 
  유리 안드로포프 KGB 의장이 7월 29일 외무성의 게오르기코르니옌코를 만난다는 사실이 CIA의 안테나에 포착됐다. 안드로포프는 인권문제가 내정간섭이라며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스파이와 반체제 인사의 교환 협상 자체를 꺼렸다. 그 는 서방국가들의 요구를 한번 들어주기 시작하면 계속 악순환이 재연될것이라고 믿었다.
 
  협상은 진전될 기미가 없었다. 그러자 브레진스키는 11월 8일 터너 부장과 함께 도브리닌이 언급했던 '행동 윤리 규범'에 대해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브레진스키는 양측 모두 외교관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만 첩보 활동을 허용한다는 생각을 해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ClA 내부에서는 반대 여론이 높았다. 한 베테랑 CIA 요원은 "잡히면 끝장인 줄 알았고 혹 잡히더라도 더 많은 정보를 실토하기 전에 그저 빨리 처형되기만을 바라는 게 순리였다"면서 "만약 행동 윤리 규범이 제정된다면 요원들은 잡히더라도 변호사부터 찾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질질 끌던 협상은 소련측이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1979년 4월 27일 소련 반체제 인사 5명이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동시에 엥게르와 체르나예프 역시 모스크바로 향했다.
 
  엥게르와 체르나예프의 구속에서부터 반체제 인사들과 교환하기까지 근 1년이 소비됐다. 이미 냉랭했던 美蘇간의 관계는 이 기간 동안 더욱 악화됐다. 미국은 비록 샤란스키를 빼내오지는 못했지만 소련측에 충분한 메시지는 전달했다.
 
  CIA는 스파이 활동을 해준 첩자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ClA의 첩자였던 오고로드니크라는 스파이가 거의 처형될 뻔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또 사드린이라는 CIA 첩자는 비엔나에서 KGB에 의해 납치됐다가 죽음을 맞았다는 소식도 들었다. 사드린은 비엔나에서 KGB에 의해 납치돼 트렁크에 넣어졌다가 트렁크에서 숨이 막혀 죽었거나 마취제 급성 중독으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1978년 한 해는 양측 스파이 조직이 얼마나 양국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해였다. 그리고 또 소련은 美蘇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희생하고서라도 반체제 인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정권 유지 차원에서…


소련경제의 심각성을 눈치채지 못했던 서방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는 미국 정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국민은 정부를 불신했고 의회는 행정부를 못믿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제사정도 신통치 않았다. 카터가 대통령이 됐을 때 6%이던 인플레율은 4년 뒤 20%를 상회했고 경제 성장률은 저조했다. 70년대 말 경기 침체로 인해 국민들의 불만은 날로 고조됐고 대부분의 서구 민주주의 국가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반적인 경기침체는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쳐졌고 국민들의 불신은 날로 더해만 갔다. 소련의 국력이 날로 팽창하고 있을 때 이에 대적하는 카터, 대처 영국 총리, 헬무트 슈미트 독일 총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 등 서구 지도자들의 손발은 제각각 놀았다. 유럽은 미국의 지도력을 기대했으나 카터로부터 그런 지도력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70년대 말 서방 국가들은 소련 내부의 문제에 대해 눈돌릴 틈이 없었다. 소련이 경제적으로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는 정도는 대부분 알고 있었다.
 
  닉슨의 對蘇 정책 기조는 소련이 서방국가들의 경제적 지원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미국 지도자들은 소련의 심각한 경제난을 미국의 잣대로 평가했다. 1, 2차 석유파동 등으로 정신 못차리던 서방 지도자들은 소련의 구조적이고 내부 모순에 찬 경제 체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CIA는 이미 1950년대부터 소련 경제 구조의 문제점에 대해 분석 자료를 내놓았다. CIA는 또 70년대부터 소련의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생필품 부족 등에 따른 국민들의 불만사항, 희미해지는 이념 사상, 민족 분규 등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ClA는 1979년 8월 소련 소비자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으며 소련 정권은 80년대부터 심각한 경제 문제와 정치적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터너 부장 역시 1980년 "소련은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있다"면서 "브레즈네프의 지도력에도 한계가 올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소련과 그 추종 세력들은 마치 전세계를 집어 삼킬 것처럼 덤벼들었다. 베트남, 앙골라, 에티오피아, 모잠비크, 예멘, 리비아, 캄보디아, 니카라과, 그라나다, 쿠바, 아프가니스탄 등… 소련은 이들 국가들이 나중에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리라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나는 역사가들과 정치인들이 소련의 붕괴와 냉전 종식에 있어서 지미 카터의 역할을 너무 과소평가했다고 본다. 카터는 냉전중 소련의 정통성을 공개적으로 문제삼은 첫 대통령이 었다. 카터의 인권정책은 동구권 및 소련 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큰 정신적 도움을 주었고 소련 정권의 비도덕성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소련 지도부는 그 누구보다 더 인권 정책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카터의 인권정책은 후임자인 로널드 레이건이 크레믈린을 상대로 치명타를 날리는데 기본 골격을 제공했다.


카터의 공과

  카터의 인권정책은 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동구 및 소련을 향한 심리전인 라디오 방송 프로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 그는 또 알렉산더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등 반체제 인사들의 글을 소련 국내로 밀반입하는 비밀 공작을 지원했다. 카터 행정부는 잊혀져 가는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책자를 배포함으로써 소련 내 소수민족의 민족 자긍심을 일깨워주는데 앞장섰다.
 
  카터는 소련이 샤란스키와 긴즈버그를 재판에 회부하자 1차 경제봉쇄를 단행했고,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경제봉쇄를 대폭 확대했다.
 
  카터는 비록 B-1 폭격기 생산 계획을 백지화 시켰지만 나토군의 현대화 계획과 퍼싱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결정한 장본인이었다. 카터는 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횔씬 이전부터 제3세계 국가에서 소련에 대항하는 ClA의 공작활동을 재가했다. 비록 작은 시작이었지만 레이건 행정부가 의회의 승인과 협조를 받아 CIA의 공작활동을 확대 발전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럼 왜 카터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로 나오는 것일까. 우선 카터는 정책 결정이 신속하지 못했다.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뒤에야, 또는 내부 진통을 겪은 후에야 실행에 옮겨졌다. 그의 인권 정책 역시 소련을 파멸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수립된 정책이라기보다는 이상주의에 밑바탕을 둔 정책이었던 것이다.
 
  또 그의 대변인을 자처했던 밴스 국무장관은 군축협상에 너무 큰 비중을 둔 나머지 마치 소련에 끌려다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B-1 폭격기 등 관심이 집중됐던 차세대 무기 개발에 제동을 걸었던 게 부작용을 낳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카터가 마치 親蘇 정책을 펼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냉전 이후에서부터 레이건 행정부까지 역대 대통령 중 카터는 소련과 가장 심각하게 충돌을 빚었던 대통령이었다. 소련 지도부는 카터야말로 수십년간 유지됐던 양국간 기본 원칙을 모두 무시해버리고 사사건건 싸움을 걸어온 지도자라고 여겼다.
 
  크레믈린은 공화당의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섰지만 카터의 정책 기조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카터는 소련 제국의 가면을 벗겨낸 대통령이었고 소련의 약점을 과감하게 공략한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그의 업적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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