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8일 화요일

제임스 본드가 플레이보이라고?

We're both orphans, James. But while your parents had the luxury of dying in a climbing accident, mine survived the British betrayal and Stalin's execution squads.

우린 똑같이 고아야. 하지만, 자네 부모님은 등반중 돌아가셨을 정도로 호사를 누리셨지만, 우리 부모님은 영국의 배신과 스탈린의 학살에서도 살아남으셨지.

- Alec Trevelyan in [Goldeneye]


제임스 본드는 다재다능한 능력과 상당한 수준의 격투능력으로도 유명하지만, 느끼한 외모와 함께 이 여자 저 여자 안 가리고 숙면을 취하는 플레이보이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카지노 로얄]에서 보여준 모습에 대해 우리나라의 많은 관객은 괴리감을 느꼈고, 그 핵심은 느끼하지도 않고, 아무 여자나 함부러 건들지 않는 새로운 성격이었습니다.

소위 "나의 제임스 본드는 저렇지 않다는!"이란 반응이었는데, 실제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는 단순한 플레이보이는 아닙니다.
물론, 여자관계가 다소 복잡하긴 하지만, [문레이커]나 [뷰투어킬] 등에서 보여줬던 시간이 남으니 동료 요원과도 숙면을 취하는 막 나가는 노는소년은 아니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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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뭥미!



1. 유년기/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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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com의 dossier에 기록된 유년기, 오타: 아버지와 출생지가 바뀌었음

제임스 본드의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년기를 일단 봐야 합니다.

제임스 본드는 서베를린에서 1968년에 태어나 스위스와 서베를린에서 성장했습니다.
(생년은 [카지노 로얄]을 제작하면서 리부팅된 것이며, 본드의 원래 생년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떠한 작품에서도 명시한 적이 없거든요.)
아버지스코틀랜드인이고, 어머니스위스인인데, 제임스 본드가 11세때 둘 다 스위스에서 등산 중 사망합니다.

이후 고모네 집에서 성장한 제임스 본드는 이튼교를 다니지만 통금을 자주 어기고 학교 여직원과 숙면을 취하는 등의 이유로 퇴학당합니다.
다시 펫츠교에 입학한 그는 경량급 복싱에서 학교 대표로 2번 출전하고 학교간 유도 리그를 만드는 등 운동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제임스 본드의 어린 시절은 배트맨(브루스 웨인)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사망을 경험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자랐단 점인데, 이 점은 결국 성장 후에 비슷한 성격을 갖는 원인이 됩니다.

본드는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캐릭터가 아니라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기 싫어하고 자존심이 무척 강한 캐릭터입니다.
고문이나 뇌물로 변절시킬 수 없는 이유는 정의감이 아니라 자존심때문인 것입니다.
(배트맨 역시 유사한 종류의 마음의 상처-트라우마-를 해결하지 못하고 가죽 껍질 뒤집어쓰고 야경단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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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브루스 웨인의 트라우마의 근본적 원인인 부모의 피살


※ 영화에선 그의 성격 형성의 근간이 되는 유년기 부모 사망이 전혀 언급되지 않다가 [골든아이]에 와서야 잠깐 언급됩니다.

※ [카지노 로얄]의 제임스 본드를 흔히들 제이슨 본과 비교하는데, 제이슨 본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입니다.
본은 살인을 싫어하지만, 본드는 그런 적 없습니다. 오히려 첫 살인을 부담없이 처리하는 냉혹함을 보여줍니다.


2. 취미 및 특기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취미와 특기들입니다.
다양한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 종목은 등반, 다이빙, 수영, 달리기 등의 혼자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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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달리는 이 장면 역시 그냥 나온 장면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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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sier에 기록된 본드의 취미, '미혼'은 모든 것이 리부팅되었단 뜻임

한편으로 펫츠교에 다닐 땐 방학 기간에 등반이나 스키 등을 전문 강사에게 배우기도 했습니다.

본드가 그나마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운동 중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복싱이나 유도와 같은 격투기 종목뿐입니다.

또한, 카레이싱을 하진 않지만, 과속운전을 즐기고, 도박을 무척 잘 합니다.
(임무수행을 위해 배웠단 설도 있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원래 도박을 잘 했습니다. 이 설은 괴작 [카지노 로얄](1967)에서 에블린 트램블때문에 나온 설입니다)

즉, 그의 취미나 특기는 모두 누군가와 경쟁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강한 자존심을 드러내고,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그의 진정한 취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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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판에서 이김으로써 능력을 증명한 뒤 딜러에게 여유롭게 팁을 주는 제임스 본드



3. 여성편력

제임스 본드는 유년기에 입은 트라우마로 인해 (남녀를 불문하고) 한 사람과 긴 유대관계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는 사고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과의 만남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의 여자 관계 또한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는 여자들과 역시 긴 관계를 갖지 못합니다.

그의 이러한 심정은 소설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잘 나타납니다.
"메리 굳나잇과의 사랑은, 다른 여자와의 사랑도 그렇지만 자신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망이 좋은 방에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제임스 본드는 아무리 좋은 전망이라도 같은 것만 보면 싫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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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 본드의 심정이 단 1g도 보이지 않는 메리 굳나잇과의 숙면


결국 그의 여자관계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및 강한 자존심으로 인한 것이라 봐야 하는 것입니다.


4. 영화에서의 모습

제작진이 원래의 궤도 즉, 소설에 가까운 모습을 그릴 때마다 보여주려 하는 것이 아무 여자와 숙면을 취하는 모습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유어아이즈온리]에서 비비가 몸 바치려 할 때 가볍게 물리치는 모습이나, [카지노 로얄]에서 샴페인 안주를 1인분만 주문하는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반면, 막장테크를 탈 때는 아무와 숙면을 취합니다.
전술했던 [문레이커], [뷰투어킬] 외에도 [네버다이]의 네덜란드어 강사, [언리미티드]의 여의사 몰리 등 많은 예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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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탈골되어도 MI6의 내부인과 숙면을 취하는 '걸레' 제임스 본드


마틴 캠벨 감독이 [골든아이]와 [카지노 로열]에서 보여준 그의 성격들은 그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것입니다.
[골든아이]에서는 오프닝의 카체이싱, 제니아와의 바카라 장면, [카지노 로열]에서는 특히 기차 안에서 베스퍼 린드와 말다툼 장면에서 이 부분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우리나라 관객들은 특히, 기차씬을 무척 지루하게 받아들이더군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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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대충 삽입된 지루한 장면이 아니라, 본드의 본질을 서술한 장면입니다



곧 개봉할 [퀀텀 오브 솔러스]는 [카지노 로얄]을 그대로 계승하는 구조이니, 이런 본드의 본질을 제대로 그려주리라 기대합니다!


댓글 12개:

  1. BLUEnLIVE님은 007시리즈에 대해서 해박하시군요.

    매니아이신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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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배트맨 - 2008/10/28 17:24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그리고, 배트맨님이야 말로 모든 영화에 대해 박학다식하시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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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튼에서 먹히고 펫츠에서 사육되었군요. 어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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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역시..^^;; 블루님의 007지식은 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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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okto - 2008/10/28 22:54
    오~ 고도의 발음 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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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페니웨이™ - 2008/10/28 22:56
    과찬이십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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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From Russia With Love] 원작소설에서 레드 그랜트에 대한 묘사를 보면, 결국 그랜트가 본드의 악의 쌍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드에게서 유머감각과 섹스만 빼면, 그랜트가 되니까요.)



    [Golden Eye]에서 전직 006의 저 대사를 들었을 때는 좀 무섭더군요.

    업무 특성상 고아출신을 영입하는 게 실용적이긴 하지만, 루마니아의 독재자 챠우체스크가 떠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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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marlowe - 2008/10/29 11:03
    [From Russia With Love]를 소설로 읽으셨다구요?

    마냥 부러울 따름입니다.



    옛날 종서 버전이 집안에 있었는데 분실 ㅡㅡ+ 했거든요.

    (어린 시절에...)



    지금 있으면 날 잡아서 전체를 몽땅 타이핑이라고 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



    그리고, 챠우세스크 얘긴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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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marlowe - 2008/10/29 11:03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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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BLUEnLIVE - 2008/10/29 11:39
    80년대에 읽은 소설인 데, 제목이 [007 러시아에서 애인과 돌아오다]였습니다. ^^



    별 건 아니고, 챠우세스크가 정권을 잡았던 시절에 의도적으로 고아들을 어릴 때부터 자기 심복으로 교육시킨 게 떠올라서요.

    일찌감치 충성심을 갖게 해서, 나중에 비밀경찰이나 경호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예전에 KBS에서 방영했던 로버트 미첨과 피터 스트라우스 주연의 [Brotherhood of the Rose] (1989)에서는 정보부가 두 명의 고아 소년을 의형제를 맺게한 다음, 함께 키우지요. 성인이 되면 최고의 파트너쉽을 발휘하는 스파이 팀으로 만들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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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서 본드의 '플레이보이 클럽'회원증이 나오죠.

    (물론 유머로 들어간 장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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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블랙 - 2008/11/06 13:16
    ㅎㅎㅎ

    사실 그 장면은 조금은 의미가 있는 장면입니다.

    이언 플레밍이 플레이보이를 통해 공개한 작품이 <여왕폐하의 007>이었습니다.

    그 예우로 영화 [여왕폐하의 007]에서 플레이보이 잡지를 보는 장면이 들어간 것이고요.

    (물론, 그 전에는 플레이보이 지에 J.F.K의 애독서로 <위기일발>이 실리는 덕분에 영화 [위기일발]이 일찍 제작된 일도 있었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 나오는 장면은 물론 어설픈 패러디 내지는 유머에 불과합니다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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